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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밥상-돌상에 놓인 찰떠기 세접시

작성자 관리자 (sctm01)
고려인의 밥상-돌상에 놓인 찰떠기 세접시 파일

돌상에 놓인 찰떠기 세접시>
타슈켄트 인근의 한 마을-
이제 막 돌을 맞은 고려인 5세 아기의 돌잔치가 한창이다. 그런데 아이의 미래를 점치는 돌잡이 상에는 찰떠기(찰떡) 세 접시 놓여있다! 지금도 쌀밥과 찰떡을 밥상에 올리고, 된장과 간장을 담가 시락장물(시래기된장국)을 끓여내는 고려인들. 우리말도 잊고,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지은 채 짧은 성씨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들이, 우리네 밥상을 지켜올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6천 킬로미터를 달려온 볍씨 한 알,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리다!>
1937년 9월, 연해주에 거주하던 17만의 고려인들은 통보도 없이 맨 몸으로 화물열차 짐칸에 실린 채, 50여 일 동안 6천 킬로미터를 달려 중앙아시아 한복판에 내팽개쳐졌다. 말도 통하지 않고,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이역의 땅은 갈대와 돌무더기만 무성하던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살기위해 불모지와 다름없는 땅을 일구고, 어렵게 챙겨온 볍씨를 뿌렸다. 농사일에 능하고, 부지런했던 고려인들은 가축밖에 기를 수 없었던 중앙아시아 땅에 벼농사를 보급했고, 그네들의 밥상에 쌀밥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씨를 활활 뿌려라!>
벼농사를 지으며 부르던 흥겨운 노래가 그대로 전해오는 이크마을. 마을의 노인들은 잔치가 있을 때면 쌀가루로 찰떡을 찌고, 배고자(만두종류)를 빚는다. 콩을 불려 순두부도 만들어 먹는다. 두부 만드는 방식은 우리와 같지만, 할머니들은 짐치(김치)담글 때 배추를 절인 물을 하루쯤 묵혀 간수로 쓴다. 또 고려인국시라고 부르는 음식은 고기와 각종채소를 고명으로 얹는 것은 우리의 잔치국수와 다를 바 없지만, 따뜻한 이곳의 기후에 맞춰 따뜻한 국물이 아닌 차가운 국물에 말아 먹는다. 우리 땅에서 자라던 볍씨가 중앙아시아에서 뿌리를 내리듯, 고려인의 밥상은 우리음식의 전통은 지키면서, 기후와 토양이 다른 중앙아시아에 적응하며 독특한 음식문화를 만들어갔다.


<고려음식, 샤슬릭과 궁합을 맞추다!>
유목민이었던 중앙아시아인들은 주로 가축에서 얻어진 고기와 유제품을 주로 먹고 살아왔다. 채소라고 해도 샐러드정도가 고작이었고, 물고기는 아예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들이 먹지 않던 채소와 물고기로 만든 음식들을 즐겨 먹기 시작했다. 바로 고려인의 채소반찬과 물고기 반찬들이 그들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한 고려인의 음식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입맛을 매료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밥상에는 서로 다른 음식문화를 조율하며 낯선 땅에 적응해왔던 고려인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고려인, 형제들이여!>
그 옛날 우즈베키스탄의 광활한 대지를 황금벌판으로 만들었던 고려인 집단농장이 있던 마을에는 노인들과 아이들만이 남아있을 뿐 이제 농사를 짓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고려인의 삶의 텃밭이었던 집단농장은 무너지고, 일을 할 수 있는 고려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러시아나 인근도시로 또다시 유랑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농장이 있던 시온고 마을에는 1937년 당시 강제 이주됐던 노인들을 위해 한국에서 운영하는 아리랑요양원이 들어서 있다. 처음 기차를 타고 이곳에 왔던 세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역사의 격랑 속에 휩쓸려, 중앙아시아에 우리민족의 뿌리를 내리며 살아왔던 고려인들. 더 늦기 전에 그들의 고단했던 삶을 우리가 보듬어 안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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